신설교학 이후에 나타난 현대설교의 동향과 과제-6(A Study of the Trends and the Tasks of Contemporary Preaching After the New Homiletics )현대 설교자들은 성경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하고 그 말씀을 선포하기 위해 생명을 바쳐 복음을 전했던 성서시대 사도들의 정신을 이어받았다. 짐 쉐딕스(Jim Shaddixc)에 의하면, 기독교회의 설교는 초대교회 시절에서부터 언제나 강해설교를 근간으로 하였다. 구약의 회당예배에서 율법서를 읽었던 전통은 초대교회에 들어서 구약성경에 대한 낭독과 사도들의 편지를 읽고 강해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이 시기의 교회들은 본문 중심의 설교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음을 강조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독교 설교는 처음부터 강해설교로서 모든 기독교의 가르침과 교훈은 반드시 읽혀진 본문으로부터 나와야 한다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여겼다.” 오늘 하나님의 인간 구속의 역사에 참여하고 있는 현대 설교자는 성서의 권위를 내려놓거나 말씀 선포자로서의 권위를 포기하여서는 안 된다. 지난 세기 척박한 조선 땅에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훗날 이 땅
‘유’달리 더운 6월. 마치 8월의 한 여름 같다.‘유’머 한마디라도 주고받아야 치솟는 불쾌지수도 내려갈 듯 싶다.‘유’쾌한 사람 하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 되고 힘 될 텐데‘유’치한 웃음으로라도 밝게 한 번 웃고 싶다.‘유’채꽃 만발함보다 웃음꽃 만발함이 더 그리운 세상. ‘유’모차 속 잠든 아이 하나가 내 마음을 알 듯 내 얼굴을 환하게 펴준다.‘유’망한 사람보다‘유’명한 사람보다‘유’식한 사람보다‘유’실수 같은 사람, 그런 사람이 더 좋은 세상. 모두가 행복할 터. ‘유’토피아가 따로 있나? 그들과 사는 세상이 천국이지. ‘YOU’의 소중함도 다시 생각해볼 6월. ‘유’익하든 무익하든 존재만으로도 충분히 존귀하고 소중한 가족과 이웃들.‘유’통업자가 되자. 그들을 위한 축복의 유통업자가 되자.‘유’무상통의 아름다운 덕을 나타내자.‘유’언비어엔 속지도 말고 퍼트리지도 말자.‘유’감 좀 있더라도 ‘유’별나게 나쁜 사람처럼 보여도 ‘유’난히 용서가 안되는 사람이어도 그래도 용서하자. 할 수있다면 모든 사람과 평화하자. ‘유’한한 나의 한계도 다시 절감해 보는 6월.‘유’혹에 자주 넘어지는 연약한 나. ‘유’흥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병든 나.‘유’행 따라
2. 터미널 케어(Terminal Care)터미널 케어란 회복의 가능성이 없다고 판정 받은 말기 환자가 겪거나 느끼고 있는 고통, 예를 들면 통증, 호흡곤란, 구토 등을 주로 모르핀을 사용하여 완하시키는 치료법을 말한다. 현대의료는 검사·진단·치료·연명(延命)이라는 4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 입원한 환자는 수많은 검사를 받고, 그 검사의 결과와 진찰의 결과 종합적인 판단 아래 진단이 내려진다. 그리고 진단에 따라 치료가 이루어진다. 이러한 현대의료는 치유가능한 병인 경우에는 커다란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진행된 암과 같이 현대의료의 첨단기술로도 치료할 수 없는 질병에 걸린 환자에 대해서는 마땅한 치료방법이 마련되어 있지 않다. 다만 시간적인 연명을 하는 일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실정이다.터미널 케어의 목적은 ‘환자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으로서 영국에서부터 시작되어 여러 국가에서 시행되고 있다. 1985년에 WHO(세계보건기구)는 「암 통증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책자를 통해서 기본 약품의 명시와 투여 방식에 관하여 다음의 원칙을 밝히고 있다.A. By mouth : 가급적 경구로 투여한다. 경구 투여가 불가능할 때에는 장내에 투여하며, 그것도 불가능할
신설교학 이후에 나타난 현대설교의 동향과 과제-5(A Study of the Trends and the Tasks of Contemporary Preaching After the New Homiletics )2. 논증방식의 문제신설교학이 안고 있는 다른 하나의 문제는 귀납적 전달 방식을 필요 이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설교가 청중에게 보다 더 잘 전달되기 위한 목적으로 신설교학이 필요하였다면, 굳이 그 전개 방식을 전통설교와의 대비 방식을 통해서 과거의 설교 방식은 전적으로 연역적(명제적) 방식이었다고 규명할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전통 설교에서도 논증 방식을 연역적 방식과 귀납적 방식을 동시에 주요 방법론으로 고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례로 성서적 개념을 정확하게 싫어 나르기 위한 목적을 가지는 강해설교의 경우 하나의 주어진 본문의 문학적, 역사적, 그리고 상황적 해석의 결과를 조직화하여 청중에게 전달할 때, 그 논증 방식은 반드시 연역적이지 않다. 얼마든지 청중으로 하여금 설교의 무대에 적극 참여하도록 귀납적 논증 형태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설교에서 귀납적 논증 방식이 가지는 여러 가지 장점이 인정된다. 그렇다면 모든 설교를 귀납적으로 하는 것이 최
필자는 요한이 제시하는 부활현현 이야기에 담긴 부활의 신학을 살펴보고 있다. 요한은 기독교 신앙의 중심 요소인 부활의 예수를 믿는 신앙이 부활현현의 체험을 통해 이루어진 것을 강조하면서 제자들이 받은 부활현현의 체험을 세 번 전달한다. 이것은 한 사건을 세 번씩이나 말함으로써 그 사건의 중요성을 특별히 강조하려는 유대교의 표현법에 따른 것이다. 요한에 따르면, 제자들은 세 번에 걸친 부활현현의 체험을 통해 확고부동한 부활신앙을 갖게 된 것을 제시한다. 이런 점에서 누가 역시 사도행전에서 바리새인 사울이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러 다메섹으로 가다가 부활의 예수를 만난 사건을 세 번씩이나 전달함을 통해(행 9, 22, 26장) 사울의 체험이 그 자신을 위해서는 물론 기독교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파되는 복음 전파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가를 제시한다. 요한은 예수의 두 번째 현현에 관한 이야기를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도마와 관련하여 제시한다. 사복음서에서 도마와 관련된 사건은 요한복음서에만 나온다(11:16; 14:5; 21:26). 도마는 매사를 운명적으로 생각하고 영적으로 둔감하며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는 사람으로 등장한다. 비록 그는 깨닫는 것이 느리지만,
호스피스는 모든 환자를 거의 본능적으로 살려 내고자 하는 일반 병원과는 달리 ‘우리는 어떻게 죽음을 맞을 것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빈센트 배리(Vincent Barry)는 “죽음을 경험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되는 것은 고독, 두려움, 고통과 의구심 등이다. 더 이상 쓸모없고 버림받았다는 감정도 마찬가지이다. 자신을 통제하거나 억제할 수 없고, 더 이상 참여할 수 없다는 것, 모욕감 등이 문제이다”라고 말했다. 안락사에 대한 최선의 대안으로는 죽어 가는 사람을 인정을 지니고 지속적으로 보살펴 주는 것이다. “수용할 수 없는 고통으로 죽는 환자들의 숫자는 고작 1%미만”이라는 통계가 있다. 호스피스 활동은 인간 생명의 사랑에서 시작된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태어난 인간의 존엄성을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이어지는 사랑에 찬 봉사 행위이다. 호스피스의 목적은 신체적 죽음을 연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의미 있는 삶을 연속하는 것이기에 적극적인 치료 방법은 사용되지 않는다. 단지 죽음에 대한 고요한 통찰력을 내포하고 임종 환자가 그의 마지막 생을 가족과 친지들에게 둘러싸여 평온하게 최종의 날을 맞도록 하는 것이며, 인간이 죽기 전에 머물면서 쉬고 생을 정리하고 완
3) 설교자의 권위를 배제한 자유로운 결론크레독은 이 시대의 설교의 위기를 강조하면서 그 한 원인으로 설교자와 청중의 관계가 전적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라고 간파하였다. 그는 기독교가 심각하게 쇠락함으로써 교회가 더 이상 세상에서 문화적 지원의 발판을 잃어버렸다고 보았다. 이런 상황에서 설교자는 성직자로서의 권위를 내세울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더 이상 본문의 권위를 담보할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제를 직시한 크래독은 성경의 저자와 본문이 차지했던 권위를 청중에게 내어 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성경의 권위와 성경 저자가 의도한 본문의 의미를 강조하는 대신 청중이 설교에 스스로 결론을 내리게 하는 방식을 주장했다. 이와 같은 그의 생각은 설교의 시작은 복음이 아니라 청중의 경험이며 청중의 기대를 고조시키기 위해 비권위적인 귀납법 설교가 보다 적합한 통화 방식임을 주창하기에 이르렀다.크레독은 연역적 설교에서 청중은 설교자가 일방적으로 설정한 명제에 대한 반감으로 인하여 설교자와 청중 간의 커뮤니케이션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보았다. 반면에 귀납적인 설교는 단정적이기보다는 설명적이며, 명령적이기보다는 권면적인 것으로 특징지어진다고 강조하면서 이런 이
다윗이 밧세바와의 불륜사건을 감추기 위하여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까지 살인한 일이 발생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선지자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어 사태의 심각성을 알게 하셨다. 나단은 다윗이 저지른 범죄를 간접적으로 지적하기 위해서 예화를 활용한다. 많은 양과 소를 소유한 부자가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서 가축을 잡는데, 자신의 양을 잡지 않고 겨우 한 마리의 양을 애지중지하는 가난한 자의 양을 빼앗아 접대에 사용했다는 이야기이다. 많은 아내와 첩들을 거느린 다윗이 남의 아내를 빼앗았음을 고발한 예화이다. 몇 년 후 다윗은 또 하나의 예화와 접하게 된다. 드고아에서 온 여인이라는 사람으로부터 들었던 이야기이다. 자신에게 아들 둘이 있었는데, 형제간에 사이가 좋지 않아 자주 다투다가 어느 날 형이 동생을 폭행치사 했고, 마을 사람들은 살인죄를 저지른 형마저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윽박지르는 상황이라 왕께 도움을 청하러 왔다는 이야기이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일어난 실화로 시작되었지만, 다윗이 여인의 큰 아들이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도움을 주겠다는 말을 하자마자, 자신이 했던 이야기가 사실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라, 암논을 쳐 죽이고 외국으로 도망간 다윗왕의 아들 압살롬에 관한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반열에 서 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로서 인간에게는 인간 생명을 지배할 권리는 물론, 인간 생명의 발전을 앞당기거나 유전학적으로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기독교 생명윤리의 또 다른 핵심 원리는 인간의 존엄성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에 살인은 가증스러운 범죄이다. 이러한 존엄성은 생명의 신성함을 포함하고 있다.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다. 세상에서 악이 넘쳐났을 때 하나님은 대홍수를 일으켜 세상을 정화하였으며(창6:11), 그 이후에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의 신성함을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9:6)라는 구절 속에서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은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며 신성성은 경외심을 일으킨다. 이것은 인간생명이 숭배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보다는 신성하게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 19
포스트모던 문화와 더불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이성 외에 지식으로 인도하는 다른 도구들에 관심을 가진다. 이를테면 감정, 경험, 그리고 은유와 같은 것들이다. 이성주의를 거부하는 포스트모던의 현대인들은 어떤 사실이나 지식을 접할 때, 그것의 보편타당성이나 객관적인 기준을 배제하는 반면 시각적으로 직접 보고 느끼는 방식으로 접촉하기를 원한다. 이러한 현대인의 욕구는 설교에서도 일방적인 선포보다는 이미지를 선호하는 특징을 보인다. 이것은 다름 아닌 이미지와 영상으로 대변되는 포스트모더니티 문화의 영향과 함께 현대 청중의 의식의 변화에서 오는 현상이다. 현대를 지칭하는 멀티미디어 시대는 다양한 미디어를 활용한 정보전달 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조성하였다. 매체의 발달 과정에서 보여주듯이 지식과 정보의 전달은 단순히 듣는 과거의 방식에서 이미지와 영상을 통하여 보는 시대가 되었다. 따라서 현대 청중은 설교 역시도 단순히 말하고 듣는 통화 방식에서 이제는 이미지나 영상을 곁들인 전달 방식을 요청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포스트모던 문화에 전면적으로 노출되어 있는 저 연령층의 청중에게서 두드러지게 발견된다. 이러한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한 전통설교 방식의 한계를 지
축복(祝福)이라는 말은 복을 빈다는 뜻이다. 누구에게 복을 빌어주는 말을 축복의 말이라고 한다.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서로에게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라는 말을 하는데 복을 많이 받으라고 빌어 주는 말이 바로 축복의 말이다.자녀들에게나 주변사람들에게 축복의 말을 하는 것이 좋은 줄은 알지만 잘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들은 내가 어떻게 남을 축복 할 수 있나 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에 축복의 말을 쉽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성경에는 야곱이 아들들을 축복하고 바로 왕을 축복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야곱이 바로에게 축복하고 그 앞에서 나오니라.” (창47:10) 바로왕은 그 당시 천하를 호령하는 왕이지만 야곱이 바로에게 인사하러 가서 바로를 축복하고 나왔다고 했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보내면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 (눅10:5) 고 했다. 평안을 받을 사람이 거기 있으면 평안이 임할 것이나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하시면서 어느 집이든 가면 평안하기를 축복 하라고 했다.대부분의 사람들이 판단하고 비난 하는 말을 잘하면서 축복 하는 말은 해보지 않았기 때문에 익숙하지 않아서 잘 못한다. 말은 태어나면서부터 수없
1. 호칭과 상징 이상 성애의 형태가 다양하기 때문에 호칭 역시 여러 가지이다. 동성애자들은 1990년부터 LGBT를 공식 명칭으로 결정했다. LGBT는 Lesbian(레즈비언), Gay(게이), Bisexual(양성애자), Transgender(성전환자)의 첫 자를 딴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이반’(Ivan), 이성애자들을 ‘일반’이라 하며, 무지개를 상징으로 채택했다. 2. LGBT의 오늘동성애자들은 그들의 문제가 공론화되기 시작하자 바로 연대(連帶)를 구성해서 ‘동성애자’ 또는 ‘이상성애자’ 대신 ‘성소수자’라는 명칭을 사용해서 인권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한국에서는 2,000년 서울에서 퀴어영화제(Korea Queer Culture Festival)가 열리면서 동성애자인권연대의 전신인 대학동성애자인권연합이 결성되었다. 이와 같은 일련의 행사와 시위를 통해서 동성애의 도덕성이나 사회적 문제점은 ‘성소수자의 인권’이라는 포장지에 싸여버렸다. 동성결혼 인정 문제에 관한 2001년의 여론조사에는 찬성 17%, 반대 67%이던 것이 2014년 한국갤럽조사연구소의 발표에는 찬성이 35%로 증가했고 반대는 56%로 줄었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2,01
필자는 요한이 제시하는 부활현현 이야기에 담긴 부활의 신학을 살펴보고 있다. 요한은 부활의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두 번째로 하신 말씀을 전달한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0:21). 평강을 주시는 것에 관한 두 번째 언급은 제자들의 삶에서 평강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주 예수의 길을 반대하고 적대시하는 사람들로 인한 박해와 고난의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살아야 하는 그들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평강의 생명이다. 이 평강은 어떤 상황에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그들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래서 요한은 부활현현 이야기들에서 부활의 주님이 제자들에게 평강을 주시는 것을 세 번이나 언급한다(20:19, 21, 26; cf. 눅 24:36).부활현현 이야기의 중심적인 내용은 제자들에게 예수의 부활을 확신시켜 주는 것과 함께 그들로 하여금 예수의 일을 계승하고 재현하는 사명을 위임하는 것에 있다. 사복음서 기자들이 공통적으로 제자들이 주 예수의 현현을 경험하는 자리에서 받는 위임의 말씀을 전달한다(막 16:15; 마 28:19f.; 눅 24:47). 요한은 ‘보낸
군(軍)에 와서 처음 목회를 하면서 제일 힘들었던 부분이 “과연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건가?”에 대한 대답을 찾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군종장교로 임관해서 들어오기 전에도 나름 교회와 선교단체에서 인정받는 사역을 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사역 영역이 불신자들인 군 환경에 적응하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예배에 참석하는 형제들도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은 군에 와서 처음 교회에 나와 본 것이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보면, 산고의 고통(?)을 느끼며 만들어낸 심혈을 기울인 설교에 전혀 반응이 없었습니다. 눈앞에는 깜깜한 군인형제들의 머리만 보였습니다. 기가 막히게 단결된 모습으로 엎드러져 있었습니다. 간간이 섞여 있는 간부들과 가족들만이 고개를 들고 목사를 쳐다봐줬습니다. 그런데 그 가족들도 뭐 그렇게 은혜 받은 충만한 표정들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항상 예의있게 목사를 대해줬습니다. 단지 아내만이 유일하게 “당신 죽 쒔어요!”라고 모니터를 해줬습니다. 사실 저는 그 때 그 성도들에게 참 고마움을 지금도 느낍니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어떤 때는 설교하고 있는 내가, 지금 무슨 설교를 하고 있는지를 모를 때가 있을 정도로 형편없었던 것 같습니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반열에 서 있다. 우리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로서 인간에게는 인간 생명을 지배할 권리는 물론, 인간 생명의 발전을 앞당기거나 유전학적으로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기독교 생명윤리의 또 다른 핵심 원리는 인간의 존엄성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이기에 살인은 가증스러운 범죄이다. 이러한 존엄성은 생명의 신성함을 포함하고 있다. 인간의 생명은 신성하다. 세상에서 악이 넘쳐났을 때 하나님은 대홍수를 일으켜 세상을 정화하였으며(창6:11), 그 이후에 하나님은 인간의 생명의 신성함을 “무릇 사람의 피를 흘리면 사람이 그 피를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음이니라”(창9:6)라는 구절 속에서 명확하게 밝히고 있다. 인간 생명의 존엄성은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며 신성성은 경외심을 일으킨다. 이것은 인간생명이 숭배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기보다는 신성하게 여겨져야 한다는 것이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