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이유를 말해주마. 처음에는 나도 내가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믿었단다. 지금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 하지만 오늘도 내가 계속 더 크게 외치고 울부짖는다면 그들이 나를 변화시키는 일은 막을 수 있지 않겠니?” 엘리 위젤, 리처드 D. 헤프너 공저(共著) ‘이방인은 없다’(산해, 62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옛날 소돔성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하기 직전까지, 심지어 유황불이 떨어져 성이 망하는 그 날 아침까지, 성문에 서서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친 이방인 한 사람이 있었다고 합니다. 처음에는 사람들도 그의 말을 듣고 약간의 반응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차츰 아무도 그의 말을 듣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외쳤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의 말씀을 변함없이 외치고 있는 이 이방인의 말에 감동받은 아이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불쌍한 아저씨, 아무리 아저씨가 외쳐도 사람들은 전혀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시나요?” 그 말을 들은 그 사람이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나도 이들이 변화되지 않는 것을 알지. 하지만 오늘도 내가 계속 더 크게 외치고 울부짖는다면 그들이 나를 변화시키는 일은 막을 수 있지 않겠니? 나는 그
둘째로 일관성이란 오른쪽에서 왼쪽까지 균등하게 적용됩니다. 부자에게나 가난한 사람에게나 성경의 해석과 법의 적용에 있어서 일관성(균일성)을 유지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특혜나 무시가 없을 때 분파가 생기지 않고, 지역감정이 생기지 않습니다. 과부나 세리 또는 죄인의 영혼이나 서기관 혹은 제사장의 영혼이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이든 유다든 사마리아이든 어느 땅이든지 간에 균일하게(일관되게) 실천하신 예수님을 봅시다. 세리의 집에 유하시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용서하지 않으셨습니까? 남의 자녀는 접시 하나만 깨도 부주의한 녀석이 되고 내 아이는 장독을 깨도 “어디 다친 데는 없니? 장독이나 된장은 또 사면 되는 것이니까”하는 식의 적용은 나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하는 기독교의 원리에 맞지 않습니다. 톨스토이의 이야기 중에 “빵을 보상한 작은 악마”라는 것이 있습니다. 악마 두목이 승진을 기다리는 작은 악마의 능력 시험을 위해 농부를 화나게 해주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농부는 여느 때처럼 밭을 갈고 있었습니다. 한낮이 되어 점심을 먹으려고 도시락을 열었으나 빵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작은 악마가 먹어치워 버린 것입니다. 농부는 허기졌으나 심성이 착
전에 우리 교회에서 부흥회를 개최했을 때 있었던 일이다. K집사 가정에서 저녁 식사를 대접한다고 집으로 초대했다. 방문해 기도한 후에 갑자기 강사가 K집사 부부에게 당황할 말을 던졌다. “이 집 부부는 자녀를 왜 이렇게 심히 미워한데요?” “강사님,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들을 끔찍이 사랑할뿐더러 교육에 대한 열정도 대단합니다.” 아내가 민망해하며 분위기를 바꾸려하자 “틀림없이 어느 자녀를 미워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알려주시니 말하는 겁니다.” 강사는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재차 같은 뜻의 말을 전해줬다. 그러자 놀라운 것은 K집사 부인이 그 말을 인정하며 대답하는 것이었다. “둘째 딸을 외국에 입양시키고 싶을 정도로 미워했습니다. 이래선 안되는 줄 알면서도 얘가 워낙 힘들게 하고 미운 짓을 하니 어쩔 수 없이 싫어지고 미워지더라구요.” 나는 담임 목회자로 이 가정에 어려움이 많다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었지만 자녀 문제가 이토록 심각한 상태인 줄은 그때서야 알게 됐다. K집사의 둘째 딸은 태어날 때부터 10개의 손가락이 모두 붙어있는 장애를 가졌었다. 그 손가락 하나하나를 분리해서 정상인처럼 만들기 위해선 병원 수술비 부담도 엄청나게 컸을 뿐더러 가족들 고통도 이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화도 받지 아니하겠느냐”(욥2:10) 목회 사역을 한 곳에서 오래 했습니다. 학창 시절 친구들도 이젠 하나, 둘씩 퇴직해 서로 연락하고, 왕래하며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 할아버지!”하며 따라다니던 손주도 이젠 많이 자라서 어느덧 초등학생이 됐습니다. 늘 부교역자를 두고 사역해오던 제가 작년에는 교회 내의 행정적인 변화로 말미암아 부교역자 없이 혼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역뿐만 아니라 교회 내에 잡다한 여러 일들도 많아졌습니다. 즉, 예를 들어 겨울철에 교회 현관에 있는 화목 난로에 들어갈 땔감들을 구해오는 일부터 시작해서 그것들을 주중에 절단하고, 청소하는 일까지 매주 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차량 관리나 쓰레기 분리수거, 심지어는 주중에 소망회 차량 봉사를 하는 등. 어떤 때는 소망회 차량 봉사를 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차원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어찌 보면 나도 할아버지인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 할아버지가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모셔오고, 모셔다 드리는 일을 하고 있다는 데에 대해서 묘한 감정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그에 뒤따르는 부속적인 생각이 “혹시 이렇게 은퇴할 때까지 차
침례교회의 시작과 관련해서 여러 많은 해석과 주장들이 있었지만 우리 교단에서 대체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학설은 크게 3가지로 보고 있다. 첫 번째는 예수님이 세우신 신약교회가 최초의 침례교회였다는 계승설과 영국 청교도 가운데 분리파들이 성경연구를 통해 시작했다는 영국 청교도 분리파 후예설, 마지막으로 침례교회를 세운 영국인들이 재침례교회의 신앙과 사상의 영향을 받아 세운 재침례교 영향설이다. 이와 관련된 논쟁은 끊이지 않고 있지만 이를 통해 침례교회가 성장하고 발전해 온 것은 사실이다. 이번에 발간된 세계 침례교회사(김용국 저, 침례신학대학교출판부, 37000원)는 침례교회의 뿌리와 함께 침례교회의 역사를 영국과 미국, 유럽대륙, 한국을 중심으로 비중있게 다뤘다. 이에 본보는 침신대 김용국 교수(사진·신학과)에게 이번 책에 대한 궁금한 점을 들어봤다. ◇세계 침례교회에 대해 어려운 일을 하셨습니다. 이번에 이렇게 정리하시게 된 계기가 궁금합니다. = “과찬의 말씀이지만 칭찬을 해주시니 힘이 납니다. 이번 책을 출판한 것은 신학교 교재로 사용하는 것과 동시에 침례교 목회자에게 침례교회 역사에 대해 객관적으로 알릴 필요가 있다고 여겨 집필하게 됐습니다.” ◇ 침
3절 전반부 평행하는 구절의 처음 두 단어는 동일하다. 마소라 본문의 첫 단어인 ‘바티흐바드’(וַתִּכְבַּד)는 그 동사 원형의 뜻이 ‘무겁다’이고, 두 번째 단어인 ‘밀하마’(מִלְחָמָה)는 그 뜻이 ‘싸움’이다. 연구자가 직역에 가까운 번역을 하자면 “싸움이 버거웠다”로 볼 수 있다. 위 대부분의 번역도 서로 간에 크게 벗어나지 않은 번역을 하고 있다: “치열해지다”, “격렬해지다”. “press hard upon”, “grow fierce”, “go sore against”, “go hard against”, “wurden hart gegen.” 다만 개역개정의 “패전하다”는 지나치게 의역한 경우다. NRSV의 “press hard upon”이 연구자의 사역과 가장 가까운 번역이다. 세 번째 단어에서는 ‘사울’앞에 붙는 전치사에 차이가 보인다. 사무엘상 31장 3절에서는 ‘엘’(אֶל), ‘~에게’이며, 역대상 10장 3절에서는 ‘알’(עַל), ‘~맞서(against)/ ~위에(upon)’이다. 사울에게 닥친 싸움의 상황을 설명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러나 뉘앙스의 세밀한 차이를 살리자면, 전자는 “싸움이 사울에게 버거웠다”, 후자
마지막으로 기술의 결합과 정보통신에 의한 영향력이 인간의 본질적 모습과 정체성에 어떠한 결과를 미칠지 주목하며 지속적인 담화를 이끌어 내야 한다. 4차 산업혁명에서 과학기술과 정보통신의 발전은 우리에게 편리함과 효율성을 증가시키는 순기능을 감당하는데 반해 정보와 기술을 소유한 집단에 의한 왜곡현상과 빠르고 복잡한 기술의 변화에 동참하지 못하거나 소외됨으로 인해 발생하는 정서적, 정신적 문제의 위험을 동반하는 역기능이 나타난다. 4차 산업혁명의 기술 중심주의 행동양식은 기계적으로 산술화된 모델을 인간의 행동방식과 삶에 적용시키려는 시도에서 그 위험성을 갖고 있다. 이러한 시도는 인간의 가치와 역량을 삶의 총체적인 관점에 근거해 판단하기보다는 조직이 정해놓은 기계적인 산출근거에 의해 평가해 기계와 같이 획일적으로 동기화함으로 인간의 본질적인 존재 목적과 추구하는 가치와 상치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기술의 활용과 발전은 사람이 수단이 되어 경제적 이득을 취하는 목적으로 이용되지 않아야 하며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을 위한 성경적 의미의 수단과 연결될 때 그 가치와 의미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기술과 정보통신의 발달은 인류 역사의 진보에 기여하는 목적을 추구
요한의 인자 기독론(5)에는 예수님의 증언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비판하는 유대인들과의 논쟁의 상황에서 자기 자신의 존재를 변호하기 위해 하신 인자 말씀에 담긴 의미를 살펴봤다. 인자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은 죄 가운데서 태어나서 죄 가운데서 죽고 멸망하는 존재라는 것과 그들은 인자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야 예수님이 바로 그 인자가 되신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이번에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공생애를 마감하는 상황에서 헬라인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찾아온 사건과 관련해 하신 예수님의 인자 말씀의 의미를 살펴본다. 헬라인들이 찾아왔다는 제자들의 보고를 받은 예수님은 그의 사역의 궁극적 국면 곧 그의 죽음을 언급하는 기회로 삼으셨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12:23). 예수님은 헬라인들의 요청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 대신 그것에 의해 촉발된 상황에 관한 신학적 해석을 제시한다. 예수님이 그들의 요청을 거절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가 헬라인들에게 구원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먼저 죽음의 길을 통과해 가셔야 한다(11:24). 지금까지 예수님은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해오셨다(2:4
오래 전에 있었던 일이다. 나의 주일 설교에 대해서 시시콜콜 따지는 교인이 있었다. 어느 주일에는 “목사님은 외국에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는 줄 아는데 어떻게 외국 얘기를 합니까?” 황 집사의 당돌한 질문에 기분이 나빴지만 절제하며 이렇게 응수해줬다. “그러니 집사님이 나를 외국 구경시켜주면 되잖아요. 덕분에 국제선 여객기 타봅시다” 그 다음 주일 중소기업의 상무이지만 비교적 경제적인 형편이 좋았던 그가 ‘목회자 외국 여행 헌금’을 150만원 해줬다. 그 돈으로 첫 번째 여행을 했던 곳이 이스라엘이었다. 나는 목회자들의 적당한 국, 내외 여행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여행을 함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할 수 있으며 그것을 여러 면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신구약 성경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목회자나 직분자들의 경우엔 흔히들 말하는 이스라엘 성지 순례는 필수적인 코스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선배인 B 목사님의 경우 모처럼 이스라엘 여행을 계획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이런 일을 겪었다고 한다. 평신도로 교회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남자 집사님에게 그 얘기를 했더니 단호히 “이 상황에선 여행을 해선 안되죠”라고 반대하더라는 것이었다. ‘이 상황’이란 그 동
마스크 전쟁이라고 하듯이 마스크 하나 더 사려고 줄을 서야 하는 모습이 씁쓸하다. 꼭 필요하다면 모르지만, 없으면 불안한 마음에 몇 개라도 여분을 소유하려고 하는 마음이라면 더 많은 것을 나누지는 못하는 대신에 작은 섬김의 시간으로 만들면 어떨까 생각해 본다. 대한민국뿐만 아니라 온 세계를 긴장하게 만들고 있는 코로나19로 “사회적 거리 두기”라는 이상한 말까지 생겨났다. 그렇지 않아도 점점 개인주의로 가고 있는 시대에 이제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꺼려야 하는 일까지 생겨 더욱 외로워지고 있다. 도시도 마찬가지겠지만 농어촌의 시골에서 연세가 드신 분들에게 마을회관은 자녀들 집보다 더 좋고 포근한 곳이다. 그런데 전국적으로 마을회관의 문을 닫고 모일 수 없게 됐다. 매일 회관에 모여 이야기도 하고 텔레비전도 보다 때가 되면 식사를 같이하는 곳이다. 가족들이 있으면 어쩔 수 없이라도 챙겨 드시겠지만, 집에 혼자 있으면 귀찮아서라도 건너 뛰거나 대충 드실 텐데 같이 모여 수다를 떨며 한끼라도 거뜬하게 드시는 곳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모일 수 없이 되어 안타까움을 주는 때에 교회에서 한 번이라도 따뜻하게 식사하실 수 있도록 섬김의 기회를 만들었다. 교회가 있는 마을에
까다롭고, 힘든 사람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요 11:16) 행복할 것만 같았던 결혼 초기의 삶은 예상을 뒤집고 가시밭길을 동행하는 듯했습니다. 각자가 선호하는 음식의 차이점부터 시작해서 서로가 추구하는 가치관이 너무나 달랐습니다. 거기에다가 개성들은 얼마나 강한지 늘 전시 상태를 방불케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죽하면 당시에 잠언 21장 9절에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사는 것이 나으니라”라는 말씀이 은혜가 될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그때 당시에 저는 한국도 아닌 미국에서 대학을 다니면서 가족의 생계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었던지라 그때를 회상해 보면 생존 자체가 기적이었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기에 믿음으로 어렵사리 버틸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오직 사는 길은 “앞으로 돌격” 외에는 답이 없었습니다. 그중에서도 학업과 물질은 둘째 문제였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가정의 화목이 우선인 듯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지으신 하나님 안에서 그 해답을 찾기로 했습니다. 첫 번째로, 하나님이 맺어주신 배우자이기에 장점뿐만 아니라 단점도 하나님께선 함께 주셨을
마지막으로 4차 산업혁명시대의 기술과 문명에 적응한 이들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소외되는 사회적 약자에 대한 요구에 기울이고 이들의 필요에 대한 자료를 모아 사역에 접목하는 목회전략이 요구된다. 3) 연결과 융합에 대한 전략 4차 산업혁명의 혁신적인 과학기술과 정보통신의 발달은 인간과 사물의 연결을 지속시킬 것이며 산업의 전반에 걸친 영역으로 확대돼 1차, 2차, 3차 산업과의 융합을 이루며 더욱 광범위하게 일어날 것이다. 기술과 정보를 통해 사람과 사물의 융합이 이뤄지고 연결 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협력과 소통이 요구되는 4차 산업혁명의 상황에서 급변하는 영향력이 교회에 미칠 현실을 고려할 때 교회는 연결과 융합의 문제에 대한 도전에 직면해 있다. 다양한 이들이 공존하는 교회는 변화를 교회에 접목할 때 발생 가능한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 성경의 원리에 입각한 소통문화와 방법을 연구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며 협력을 통해 융합에 대한 논의를 이뤄나가야 할 것이다. 기대되는 융합의 과정은 대형교회의 전략을 모방하고 답습하는 형태가 아닌 물적, 인적자원의 풍부하고 목회에 대한 자료가 다양한 대형교회 전략과 세심함과 창조적 정신이 강한 개척교회의 특성이 조화를 이루는
성경의 여러 책들 가운데에는 서로 간에 ‘평행’(平行, paralleled) 혹은 ‘공관’(共觀, synoptic) 하는 본문들이 있다. 어떤 사건이나 어록이 한 책에서 뿐만 아니라 다른 책에도 같이 등장하는 경우, 그 본문들을 평행 혹은 공관 본문들이라 일컫는다. 아마도 성서 독자들에게 ‘공관복음’이라는 용어가 익숙할 것이다. 신약성서의 네 복음서 중, 마태, 마가, 누가의 복음서가 서로 매우 유사한 평행 본문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이 세 권을 공관복음서(Synoptic Gospels) 라고 부른다. 그래서 이 세권은 같은 역사적 자료나 전승에서 비롯됐거나 이들을 공유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공관복음서의 평행 본문들 간에 쉽게 보이는 것처럼, 평행 본문이라고 하여 꼭 서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작아도 분명한 차이가 보이기 때문에, 이런 변이는 성서 독자들과 연구자들의 탐구 대상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마태복음 5장 3절)라는 구절은, 평행 본문인 누가복음에서는 “심령”(마음)이라는 단어가 빠진 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누가복음 6장 20절)로 적혀있다. 이런 차이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개별적인
미국에 있는 동안 같은 지방회에 속한 한 교회의 이야기다. 한인 침례교회로 바로 옆에 규모가 큰 미국인 침례교회의 4분의 1 정도도 안 되는 교회가 있었다. 담도 없이 잔디밭으로 연결된 두 교회가 예배를 드린 어느 주일 오후에 미국인 교회 몇 분들이 한인교회를 찾아오셨다. 그리고 한인교회 건물을 둘러본 후 목회자를 만나 이야기를 한 것은 “한인교회를 보니 어린아이들과 성도들이 많이 늘어나는 것 같이 보인다. 하지만 우리 교회는 노인들만 있고 점점 교인들이 줄고 있어서 큰 건물이 필요 없고 운영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한인교회 건물과 우리 미국인 교회 건물을 서로 바꾸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한인교회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어서 “큰 건물을 사용하면 좋겠지만 우리는 돈이 없다”며 아직 재정적 부담이 커서 할 수 없다고 거부를 했다. 그러나 미국 교회에서 오신 분들은 그런 것은 아니라며 그냥 교회 건물을 바꾸자는 것이라고 재차 이야기했다. 그래도 이해를 못하는 한인교인들을 보며 한 주 동안 생각하고 다음 주에 이야기를 하자고 돌아갔다. 한국 사람으로서 생각할 때 당연히 재정적인 것을 고려할 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다음 주에 다시 찾아온 미국인
“챌린저 호는 1986년 1월 28일에 발사되었다. 하지만 이 우주선의 비행은 우주선의 폭발과 승무원의 사망으로 끝났다. 사고 원인은 우주선의 1단계 추진 장치인 좌측 고체연료 로켓에서 불꽃이 타올랐기 때문이다. 고체연료 로켓의 핵심부품인 오링(O-Ring)이 고장 났고,이 때문에 고체연료 로켓과 외부 연료탱크 사이를 채워주는 연결 부분이 취약해졌다.” 아리 두루넨 저(著) 최성욱 역(譯) ‘더 나은 사람들의 역사’(아름다운 날, 80, 81쪽) 중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못’과 ‘나사’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건물이나 기계도 못과 나사가 연결해주지 않고 고정해 주지 않으면 아무런 기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자동차의 경우 약 2만개의 부속품이 있는데, 이 많은 부품을 못과 나사가 연결을 합니다. 가장 주요한 심장부인 엔진에도 10만개의 나사가 필요합니다. 1969년 인류를 싣고 최초로 달에 착륙한 아폴로 11호는 약 570만개의 부속이 있고 이 부속들은 모두 작은 나사못들로 연결되었습니다. 1986년 발사된 챌린저호는 73초 만에 공중에서 폭발했습니다. 그 원인은 연료장치의 밸브 가운데 잠금장치 하나의 오링이 떨어져 나갔고, 이것이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