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인가, 잘 알고 있던 사람이 연락이 왔다. “교회를 옮겨야겠는데 좋은 교회를 한 곳 소개 해주세요” “아니 지금 출석하는 교회가 있지 않습니까?”“있기야 하지요. 그런데 목사님 설교가 도무지 마음에 와 닿지 않아서요. 좋은 설교를 하시는 목사님이 시무하는 교회 좀 없어요?”그 사람은 ‘좋은 설교’에 대한 갈망으로 교회를 옮기고 싶다고 했다.나는 “좋은 설교란 없습니다 오직 바른 설교가 있을 뿐” 이라고 했다.“어떤 설교를 듣더라도 언젠가는 싫증이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지금 출석하는 교회에 좀더 진득하게 눌러 있으라”고 권면 했지만 이미 기존 교회에서 마음이 떠난 그 사람의 마음을 돌리기는 힘들었다.나는 그 사람에게 예언 아닌 예언을 했다.“당신이 ‘좋은 설교’를 찾아서 교회를 옮기고, 설혹 합당한 교회를 찾더라도 조금 지나면 ‘더 좋은 설교’를 찾아 다시 길을 떠나게 될 것이다” 라고 말이다.주변 사람 가운데 이 친구와 같이 비슷한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좋은 교회 없습니까?”“은혜스럽게 예배드리는 교회를 찾고 싶은데요”“찬양이 살아 있는 교회에 가고 싶은데요”“기도가 살아 있는 교회는 없습니까?”“사랑이 충만한
각 교단은 그 교단이 갖는 독특성을 함유하고 있다. 성경을 이해하는 전반전인 공유에도 교단이 지니는 신학적인 이해에 차이가 있다. 대체로 구원에 대한 부분과 교회에 대한 부분에 차이가 교단의 성격을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교단의 신학적인 입장은 교단 신학교의 가르침에 국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교단의 구성원 전체를 통해 자연스럽게 드러나게 된다. 우리교단의 다음세대를 위해 바른 성경관을 가지고 침례교의 한 구성원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할 책임이 담임목회자를 비롯한 담당 사역자들에게 있다. 이것은 교단의 정체성에 대해 분명한 이해가 전제되어 있어야 하며 이러한 정체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교단 공과이다. 각 교단이 갖는 다양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교단 공과를 발행하는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단순히 외형적인 평가나 시각적 자료의 차이의 접근이 아니라 교단의 공과 교육을 통해 교회의 구성원이 자연스럽게 침례교의 한 구성원으로 성장하게 되기 때문이다. 단지 어떤 공과의 구성이 잘 되었다는 것이 교회학교의 어린이들을 섬기는 교사들의 편의나 혹은 사역자들의 입장에 따라 취사선택되고 있다면 부분적인 효과를 기
얼마 전 올 들어 다섯 번째로 장례를 치렀다. 한 해 평균 두 번 정도 치르곤 했는데 올 해는 절반도 지나기 전 벌써 다섯 번이나 치른 것이다. 부교역자 시절 섬기던 교회에서는 교인이 많은 탓에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장례를 치른 적도 있지만 지금 섬기는 교회는 그에 비할 수 없는 작은 교회이기에 정말 많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여하튼 노인들의 비중이 워낙 크다 보니 어느 정도는 예측 가능한 일이기도 하고 그러다보니 죽음이라는 것을 그리고 죽는다는 것을 자주 생각하게 된다. 사실 대부분의 노인들은 자신들의 죽음을 준비한다. 자신들의 손으로 자신들의 수의를 장만하기를 원하는 것 같다. 우리 교회의 연세 많은 성도들도 대부분 수의를 장만해 상자에 담아 자기 방 장롱에 보관하고 있다. 준비하는 이유에 대한 여러 가지 속설들이 있지만 자신들의 죽음을 준비한다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수의와 함께 준비하는 것은 무덤이다. 자신이 묻힐 묘 자리를 미리 정해놓거나 아니면 한 술 더 떠 아예 가묘를 만들어 놓기 까지 한다. 어느 사모님의 장례식에서 남편이신 목사님이 자신과 후손들의 묘 자리를 만들어 두고 그것을 자랑삼아 말씀하시는 것을 본 적도 있다. 수의든 묘 자리
연봉의 많고 적음을 떠나, 우리는 누구나 연봉 인상을 간절히 바란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책임의 증가는 회피하면서 연봉 인상만을 바라고 있다. 그렇치 않다고 강력하게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러나 당신 자신의 속 마음을 스스로 속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는 현실적인 태도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승진과 연봉 인상은 과거의 노력과 미래의 기대 때문에 주어지는 것이다. 어떻게 그러한 연봉 인상이나 승진을 얻어내는가? 우선 매일 아침 15분씩 일찍 출근하라. 15분 일찍 출근하면 하루를 제대로 시작할 수 있다. 고용주들은 당신이 일찍 출근 한다는 것을 알아본다.늦게까지 일하는 것보다 일찍 출근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다. 다음으로 마치 그 일에 승진이 달려 있는 것처럼 각각의 업무를 열심히 처리해라. 물론 각 업무가 자동적으로 승지과 연결되진 않는다. 하지만 하나하나가 쌓이면 그 효과는 무시할 수 없는 작용을 한다.각 업무에 최선을 다할 때 여러분은 긍정적인 평가를 얻게 될 것이고, 이는 훌륭한 안전장치이자 승진 보험인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하는 일에 흥분과 열의를 보이고, 그러한 열의가 얼굴의 미소로 나타나게 될 때 당신의 앞날은 보장되어
교회학교 다음세대를 준비하다!를 시작하며 우리 교단의 여름성경학교 공과의 구성은 하나님, 예수님, 성경의 진리에 관한 내용으로 세 영역을 근간으로 해서 공과를 구성하고 있다. 금년에 진행되는 성경학교는 ‘히스토리’라는 주제로 하나님의 구원사역에 초점을 두고 있다.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전달하실 때에 단순히 어떤 사건들의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을 향한 구원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으며, 특별히 성경의 인물들을 통해 세상이 주는 풍성함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의해 하나님의 사람으로 세워지는 과정을 세 개의 과를 통해 기술하고 있다. 첫째로, 아브람을 통해 그가 이전에 우상을 섬기던 집안에서 시절을 보내다가 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에 그가 누리고 있었던 환경, 재물, 사회적인 지위 등을 내려놓고 하나님을 따르게 되었을 때에 많은 고민과 걱정이 앞섰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브람은 그 생애 가운데 세상의 보이는 것을 추구하고 결정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결정을 하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어려운 결정은 자신의 유일한 핏줄인 이삭을 재물로 바쳐야 했던 시기일 것이다. 부모에게 자식은 그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으며 그 가치를 정
요즘 가장 대중화된 통신 매체는 스마트 폰일 것이다. 나도 그냥 전화와 간단한 문자만 주고받는데 스마트 폰이 뭐 그리 필요하겠나 싶어서, 또 남이 사용하는 것을 보니 여간 복잡 한 것 같아서 그럴 시간 있으면 책 한 줄이라도 더 읽을 것 같아서 구임을 미루고 있었는데 아이들이 스마트 폰 구입해서 스마트하게 살라고 하기에 년 초에 구입해서 사용하고 있다. 처음 몇 날은 익숙하지 않아 고생을 했는데 요즘은 제법 이것저것 사용하는 폭이 넓어졌다. 그중에 카카오 톡이나 이나 카카오 스토리, 페이스 북을 열면 ‘친구’ ‘친구 찾기’ ‘친구 신청’ 같은 문구가 뜬다. 신청에 수락을 누르면 “이제부터는 친구입니다” 라는 문구가 뜬다. 친구! 참 친근한 단어이다. 친구! 하면 편하고 좋다. 그러나 편하고 좋다는 것과 막 대하는 것은 다르다. 함부로 하는 것과도 다르다. 함부로 하거나 막 대하면 불편해 진다. 불편하면 더 이상 친구가 아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그리고 제자들을 부르셨다. 하루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 이제 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인간은 야누스처럼 양면성을 지니고 사는 존재라고 한다. 천사의 마음과 야수의 본성, 무한한 희망과 더불어 육체로 인한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다.이처럼 한계와 상대성을 지니고 있는 육적인 존재를 극복하고자 인간들은 철학을 연구하고 종교에 의존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 육적 존재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인간의 영원한 과제이다. 이와 같은 의미로 우리의 육신적 한계와 그것을 극복하는 길은 무엇인지 깊이 연구하고 생각는 지혜가 필요하다.성경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지으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인간의 몸은 광물질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많은 수분과, 약간의 석회, 인, 탄산, 염분, 철분, 유황, 붕소, 마그네슘 등 이것들을 물질적 가치로 환산하면 쌀 한 가마 값도 채 안 된다.이처럼 물질로만 따지면 우리 신체의 가치는 보잘 것이 없다. 게다가 물질은 언젠가는 그 수명이 다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물질로 된 우리 몸은 노쇠하고 후패해져 언젠가는 필시 그 수명이 다하여 티끌로 허무하게 돌아가야만 하는 것이다.그러므로 그와 같은 제한성을 지닌 몸을 입고 사는 우리는 그 육체의 힘과 미를 절대적인 것으로 의지하거나 자랑할 수 없다. 육체의 제
교회학교 다음세대를 준비하다!를 시작하며 이 글의 기획 의도는 다음과 같다. 교회의 성장 특히 교회학교의 성장에 대한 고민은 있지만 교회 내외적으로 모든 상황이 매우 어려워지고 있기에 개별 교회가 고민하고 준비하기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시점이다. 이에 교회가 다음세대를 위해 준비해야할 것이 있다면 그것이 어떤 것이며 어떻게 방향을 정해야 하는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 / 김시백 목사(교회진흥원 아동담당)교회학교 현황에 대하여 한국교회는 100여년의 역사 가운데 괄목한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 순위는 모두 우리나라에 있다고 회자될 정도로 부흥의 역사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어느 덧 교회학교의 성장은 둔화되었고, 다수의 교회가 그 심각성을 피부로 느끼는 시점이 되었다. 시골지역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대도시에서도 동일한 문제가 되고 있다. 특정한 현상에 문제이기 보다 주일학교에 인원이 전반적으로 하락하고 있는 추세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전반적인 교회성장의 둔화에 대해 지역과 개별교회에 해당된 사항에 한정된 것으로 머무르지 않고 또 다른 하나의 요인으로 교단적인 특수성으로 분석하고 있는 입장이 있다. 교육정책 수행을 분석한 고신총회 교육
오래 전 친한 친구와 함께 진로를 놓고 심각하게 고민하며 기도한 적이 있다. 우리는 그 때 대학진학을 앞에 두고 어느 학과를 선택할 것인지를 놓고 작정기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 달이 지나도록 아무런 응답도 받지 못해 안타깝던 차에 친구가 응답을 받았다고 연락이 왔다. 그래 뭐라고 응답하시더냐고 물으니 그 친구 왈, 하나님은 내가 어느 학과를 선택하든 개의치 않으신단다. 뭐 그게 응답이냐고 말했지만 지금 생각하니 아주 정확한 응답이었다. 결국 그 친구는 영문학과를, 나는 신학과를 선택했고 결국은 둘 다 목사가 되어 각각 일선과 학교에서 사역을 하고 있다.과정은 달랐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을 간 것이다. 우리는 흔히 기도를 하면 족집게 같은 응답을 원한다.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놓고 기도할 때 정확히 이것이라고 말씀하시는 음성을 듣기를 원하지만 실상 그런 응답은 흔치 않다. 사역을 하다보면 답답한 현실 때문에 고민하는 자들이 찾아와 상담을 한다.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도 결정을 못하기 때문에 명쾌한 목사의 답을 듣고 싶어서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정답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정답은 이미 자신이 알고 있었다. 단지 정답대로 사는 것이 두려웠을
오늘의 시대는 양성사회에서 단성사회로 변화되어 가고 있다. 남자가 부엌일과 육아를 하고 여자가 축구와 레슬링 씨름을 하기도 한다. 과연 남녀는 같은 존재일까? 남녀는 생물학적으로 분명히 다른 존재이다. 남녀는 생식기뿐만 아니라 가슴 어깨 목소리 같은 제2차 성징으로 뚜렷이 구분이 된다. 그리고 여자의 세포는 x염색체를 2개 갖는 반면 남자는 xy염색체를 갖는다.최근 영국의 러벨배지와 굿펠로우라는 두 학자가 “y염색체에 사람의 태아에서 고환을 만드는 데 방아쇄 역활을 하는 유전자를 발견했다”고 한다. 또한 남녀간의 뇌의 구조가 다르다는 것이 밝혀졌다. 미 캘리포니아 대학의 고스키 박사는 뇌의중앙부에 있는 작은 시상하부의 앞쪽 일부가 남자의 경우 여자보다 2배가 크다는 것을 알아냈는데 그 후 학자들에 의해 뇌의 5군데가 남자가 더 크거나 여자가 더 큰 사실을 밝혀냈다.아동들 앞에 심리학자들이 전차대포, 스포츠카 등의 장난감과 젖병, 인형 등을 같이 놓아 두었더니 남자는 전자를 여자는 후자를 택하였다고 한다.이밖에 학업 성적을 보면 남자는 수리에 여자는 언어에 우수성을 보이고 남자는 입체적 위치 감각에 여자는 표정 뒤에 숨어 있는 감정파악에 특출하다는 것이 실험자
태국에 갔을 때 호랑이 쇼를 본 적이 있다. 조련사가 호랑이에게 명령을 하고, 때로는 채찍질을 했다. 혹시나 야성이 발동하여 갑자기 ‘어흥’ 하고 확 덤벼들지는 않을까 마음 졸이기도 했다. 그러나 던져주는 고깃덩어리에 머리를 조아리며 덥석덥석 받아먹고, 시키는 대로 군말 없이 복종하고 있는 것이었다. 신기하면서도, 맹수가 이렇게 고분고분해지도록 훈련된 과정은 어땠을까 하는 생각과 짠한 마음이 앞섰다. 그런데 쇼를 하고 있는 호랑이와, 목회자의 모습이 겹쳐지는 듯해서, 쇼를 보는 내내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이런 모습이 혹시 오늘날 우리 목회자의 모습은 아닐까, 아니 내 모습은 아닐까 두려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바울은 로마서 첫 머리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라고 선포하면서 시작한다. ‘벤허’ 영화에서도 보듯이, 로마시대는 영웅이 활개 치던 시대다. 모두가 출세가도를 달리며 영웅이 되고자 한다. 그 대표적 인물이 ‘메살라’다. 그는 자신의 출세를 위해서 죽마고우인 ‘유다 벤허’를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만다. 그리하여 ‘유다 벤허’는 발에 쇠고랑을 차고 전투함 밑바닥에서 노를 젓는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이런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도
집에서 기르는 같은 동물인데도 고양이는 따뜻한 방에서 주인과 함께 자고, 개는 추운 마루 밑에서 잔다. 왜 그럴까? 과학적이거나 실제적인 대답은 아니지만, 우리 조상들에게서 내려오는 대답이 있다.먼 옛날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개와 고양이를 함께 키우고 있었는데 그 정성이 남달라서 비록 자기가 굶는 한이 있더라도 개와 고양이를 굶기는 법은 없었다. 주인의 이 지극한 정성에 보답하기 위하여 개와 고양이는 하나님이 가지고 있다는 귀한 보물을 훔쳐다가 주인을 부자로 만들자고 합의를 보았다.그리하여 둘은 천신만고 끝에 보물을 구하여 집으로 돌아오는데 도중에 강을 건너게 되었다. 그래서 개는 헤엄을 치고 고양이는 보물을 입에 물고 개의 등에 업혀 강을 건너고 있는데 무심코 개가 고양이에게 말을 걸자 고양이가 입을 열어 대답했다. 그 바람에 그만 입에 문 보물이 강물 속으로 떨어지고 만 것이 아닌가! 그 무심코 내뱉은 말 한마디가 여기서도 재난이 되어서 만사를 그르치게 된 것이다. 개와 고양이는 안타까워서 떨어진 강물 속을 들여다보며 발을 동동굴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개는 추운 강바람을 쏘이며 서성거려봐야 헛일이라고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고양이
오월이 다 돼가는 오늘 대전에서는 눈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이른바 ‘꽃샘추위’일진데 벚꽃위에 무심하게 내리는 눈이 가관이라 한컷을 남겼다. 파르르 떨다 못해 코 빠진 벚꽃잎이 봄바람에 흩날려보지도 못하고 때 모르는 진눈깨비에 애처롭게 부대끼고 있다. 인터넷에서는 한라산의 때 아닌 눈꽃모습이 보인다. 해마다 이맘때가 되면 아침마다 옷장 앞에서 망설이게 된다. 코트를 입을까, 봄 재킷을 입을까? 뭐, 마음이야 무겁고 두꺼운, 무엇보다 너무 입어서 지겨운 코트 대신에 가볍고 화사한 봄 재킷을 입고 싶지만, 섣부른 선택은 감기를 자초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꽃샘 때문이다. 예쁜 이름에 속으면 곤란해진다. ‘꽃샘에 설늙은이 얼어 죽는다.’ 이런 무시무시한 속담까지 있을 정도니까. 어쩌다가 거를 법도 한데 꽃샘추위는 꾸어다 해도 한다고 할 정도로 꽃이 필 무렵에는 꽃샘이, 잎이 필 무렵에는 잎샘이 어김없이 등장한다. 특히나 춘분 즈음에 꽃샘은 겨울 못지않게 매섭고 차기로 유명하다. 그도 그럴 것이 꽃샘바람의 실체는 소소리바람이다. ‘소소리’가 본래 ‘회오리’를 뜻하는 말이었다는 것을 알고 나면, 어떤 시인이 ‘성깔 남은 바람’이라고 표현했던 시구가 절묘하게 느껴진다
결과에 대해서 내가 책임을 질수 있는 것은 철저하게 지고 하나님께 원망과 불만을 토하지 말자.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 시대의 뛰어난 주인공이 되라. 혼인잔치 집에 손님이 되지 말라. 구경꾼도 되지 말라. 뒷일이나 처리하는 자도 되지 말라. 다만 그 집에 주인공이 돼야 한다. (시31:15)내 시대가 주의 손에 있음을 알자. 바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참되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거짓되고 허망하게 살지 말아야 한다. 아름답게 살아야 한다. 추잡한 인생을 살지 말아야 한다. 알차고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 텅빈 인생, 공허한 인생을 살이 말아야 한다. 보람 있고, 의미 있는 인생, 가치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 바른 인생을 살기 위해서는 버려야할 것들이 있다. 무기력한 사람은 생의 의욕이 없다. 적극적인 정신과 능동적 자세가 부족하다. 썩은 물고기가 탁류에 떠내려가듯이 인생을 무의도식 속에서 힘없이 살아간다. 그리스도인들은 맑은 눈과 기쁘고 환한 얼굴로 정열과 용기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또한 무관심한 사람은 삶의 목표가 확립되어 있지 않다. 무사안일 속에서 하루하루를 무의미하게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자신의 대하여 열의가 없고 성의가 없다면, 불성실한 태도로
지난 주간에 성도님 한 분이 대전 큰 병원에서 수술을 받아서 성도 몇 분과 함께 심방을 다녀왔다. 심방을 다녀 온 후 마음이 조금 무거웠다. 환자의 상태가 나빠서가 아니고 함께 다녀오신 성도님 한 분 때문이었다. 그 분은 왕복 두 시간 반 동안 말씀을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원래 평소에도 말씀이 없으셨던 분도 아니고 그렇다고 화가 나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 성도님은 치매가 진행 중인 분이셨던 것이다. 육 개월 전에도 서울을 다녀 온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그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 사이 치매가 더 진행된 것 같았다.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하셔서 찬송가도 열심히 부르곤 해서 그 정도까지 진행되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는데 말씀을 한 마디도 하지 않으시고 사람들의 이야기에 어쩌다 한 번씩 미소 짓는 것이 전부였던 것이다.가만히 생각해보니 요 근래 그 분의 말씀을 들은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배 끝나고 나가면서 나에게나 다른 성도들에게 건네던 인사말을 그냥 웃음으로 대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말이 없어진다는 것은 치매의 대표적 증상 중의 하나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분은 우리 교회에서 그야말로 ‘기둥 같은’ 일꾼이었다. 그런데 삼 년여 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