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어린이집회와 장년 집회 통해 결신자 초청 잔치해외 단기 선교는 한국교회가 해외 파송 선교사들을 지원하고 현지 교회에 다양한 사역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경우가 많다. 여러 부족한 점이 많지만 무엇보다 현지에서 단기간 최대한의 성과를 거두는 경우가 많다.21년째 한결같은 전도 사역으로 필리핀 지역 복음화에 작은 밀알을 심고 있는 침례교 아멘선교회(이사장 이진선 목사, 회장 김광중 목사)의 한비전도대회는 대회 시작부터 절제된 생활과 관리·감독 속에 상상할 수 없는 일정으로 강행군하기로 유명하다.새벽 어김없이 5시 기상과 함께 대원 전원이 참석하는 새벽예배를 드리게 된다. 새벽예배는 하루를 허락하심에 감사하며 이 날 있을 사역을 점검하고 무엇보다 통성기도를 통해 전도에 대한 확신과 믿음을 심는 시간을 가진다.새벽예배를 마치고 전도대원들은 바로 아침 식사를 하게 된다. 전도지역이 본부인 아멘선교교회에서 적어도 2~3시간 거리에 있기에 서둘러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식사는 전도대원들이 직접 챙겨온 쌀과 밑반찬 등으로 해결하게 된다.한 전도대원은 “현지 음식을 먹기도 했지만 한국인은 ‘밥심’이라는 말처럼 우리 음식을 먹어야 힘을 내서 움직일 수 있다”고 귀뜸했다.
북한의 교육, 문화, 경제, 체제 등의 강의 진행한국오픈도어선교회 북한선교연구소(북한선교연구소)와 쥬빌리구국기도회 고양파주모임은 오는 4월 8일부터 일산장로교회교육관에서 북한선교 자원들의 교육과 한국교회 성도들의 북한선교이해를 위한 2014 북한선교학교를 진행한다.현재 북한은 세계인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데 반해 북한에 대한 깊은 이해가 많이 떨어지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한국교회 같은 경우 북한선교를 외치는 이들과 북한을 위해 기도하는 교회는 많이 있지만 그들의 나라를 정확히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은 부진하다. 이에 북한선교연구소는 이번 선교학교를 통해 북한선교 관심자들에게 전문적인 지식을 제공하고 네트워킹과 전문가들과의 접촉채널 역할을 하며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북한에 대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기도제목을 나눌 수 있도록 해 북한선교를 위한 단단한 발판을 마련하는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한국교회는 오래전부터 북한에 대해 관심을 가져오면서 여러 방법을 통해서 통일을 위한 교육에 힘써왔다. 2000년대 이후로부터는 커리큘럼을 갖춘 북한선교훈련들이 생겨나기 시작해 일반 대중들에 비해 교육의 기회가 많이 주어지고 있다.그러나 이러한 북한선교훈련에는 몇몇 한계에
필리핀 영적 부흥과 민족 복음화를 75명의 전도단을 이끌고 온 침례교 아멘선교회(이사장 이진선 목사, 회장 김광중 목사)는 지난 2월 23일 필리핀에 도착, 본부 숙소인 필리핀 아멘선교교회에서 제21차 한․비 전도대회 개회를 시작으로 공식 일정에 들어갔다.숙소까지 새벽에 도착한 인원들은 피곤함과 지역 무더위에 적응하기 위해 애를 썼지만 무엇보다 자신 스스로가 이번 선교대회의 영적 무장 세력으로 복음의 영적 무장자로 선교대회 참석자들은 기대와 벅찬 감동으로 대회에 임했다.특히 전도대원들은 전도대회 일정을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간구하며 뜨겁게 통성으로 기도로 첫 일정을 시작했다.윤내일 목사의 사회로 진행된 개회예배는 이문구 전도사(목양)의 대표기도가 있은 뒤, 중창단 특별찬양, 아멘선교교회 부설 학교공연팀의 공연이 있은 뒤, 이진선 목사가 “예수의 사람들”(막3:13~15)란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이진선 목사는 “예수의 사람은 예수와 함께 한 사람들로 바로 우리라고 믿음으로 고백해야 할 것”이라며 “예수의 사람들은 전도도 하는 사람들로 우리 모두 보냄을 받은 사람으로 이번 전도대회가 주님 안에 결실을 맺는 자리가 되길 소망한다”고 전했
집주인들의 리더십이 워낙 중요하다보니 한편으로 이들이 영적으로 무너져 버리면 교회 자체가 위기에 처하는 약한 부분도 있었다. 집주인들이 영적으로 교만해 지면 교회 자체가 어려움을 당하게 되고(요삼 1:9~11), 또한 말씀에 굳게 서 있지 않으면 언제든지 이단에 빠질 우려가 높았다. 그래서 바울은 이단들이 집을 방문하지 못하도록 하고 집안으로 끌어들이지도 말도록 경고했다(딤후 3:6; 요일 1:7, 10). 아예 처음부터 차단해 이단과 어울리지 말 것을 부탁했다. 집주인들의 역할이 가정교회를 확장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한편으로 이런 취약점이 노출되다 보니 바울은 평신도 리더십 강화를 꽤한 것을 볼 수 있다. 교회의 리더십 구조로 감독, 장로, 집사를 두고 그 역할도 소개하고 있고(딤전 3:1~7; 딛 1:7~9; 딤전 3:8~13), 나아가 교회 내에서 각 성도들이 자신이 받은 은사대로 섬길 것을 강조하고 있다(엡 4:11~13; 벧전 4:10~11; 고전 12:4~11). 바울의 교회 리더십 구조는 직분의 우위에 있지 않고 모든 성도들이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 아래서 한 몸을 이루기에 각자 받은 은사대로 섬겨 교회에 덕을 세우고 유익하게 하는데 있음
필리핀에서 사역하고 있는 최영태 선교사의 선교지역인 중부루손 앙겔레스에 예수의 거리가 있습니다. 이곳은 GDP 2275억$ 세계 45위에 걸맞지 않게 완전한 빈민촌입니다. 이곳의 사람들은 하루 벌어 하루 먹기도 힘들며 일거리가 없어 노는 사람들이 허다한 실정입니다. 아이들도 많이 낳아서 한 가정에 5~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이곳에는 셀리나라는 여인이 살고 있습니다. 셀리나는 BIC교회에 출석했지만 지금은 나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궁경부암으로 투병중이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진찰조차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채 점점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셀리나의 형편은 수술은 커녕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상황입니다. 최영태 선교사의 긴급 서신안녕하십니까! 최영태 선교사입니다. 우선 셀리나를 병원에 데려가서 진단을 받았습니다. 진달결과 병원의사 측은 현재 상황에서 수술은 어렵고 방사선 치료를 권장했습니다. 이곳에서 6주간 시행하는 이 과정은 첨부한 문서에 나와 있고 병원 시술비만 169,750.00페소로 한국 돈 약 470만원이 예상 금액입니다. 그 이외에도 필요한 금액들이 많을 것입니다. 또한 교통비를 비롯해, 약값 등 비용도 만만치 않으며 음식 또한 치료
기독교가 종교의 자유를 얻은 313년까지 수많은 박해와 핍박을 이겨냈다. 네로와 도미티안 황제의 대박해를 비롯해 2세기와 3세기에 각각 있었던 박해 속에서도 교회가 흔들림 없이 설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가정교회의 정신 때문이었다. 아무리 외적인 장애물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할지라도 내적인 연합과 희생정신이 버티고 있었기에 이를 꺾지 못했다. 처음에 예루살렘에서 시작했던 가정교회가 3세기에 걸쳐 헬라권 전 지역으로 흩어져 나갈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초대교회의 가정교회 정신은 당시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쳤기에 마침내 로마가 기독교를 수용하게 되었을까? 필자는 세 가지 측면에서 영향을 끼친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첫 번째 사회적인 측면으로 한 몸의 삶이다.초대교회의 가정교회가 1세기부터 3세기까지 헬라권 지역에 미친 가장 큰 영향이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다는 정신이다. 이는 현존하는 국적과 신분과 성별 차이를 철폐한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당시 사회적으로 엄청난 관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초대교회 당시 신분 이동이나 신분 상승이 불가능한 시대에 그리스도 안에서 ‘동등’하다는 것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누구든지 같다는 것이다.
나가사키 땅 밟기 세미나 (AM9:00-10:00)일본선교역사 소개나가사키의 십자가 동영상오오무라-운젠지옥 순례코스 설명(15분 버스이동-가리라야호수 설명, 교회개척 이야기) 히가시소노기 26순교자 승선지 (AM10:15-11:00)나가사키 26순교자 이야기미미도리(귀 베기) 체험고백: 당신은 주님을 사랑합니까 찬양: 갈릴리 바닷가에서(고속도로 30분 버스이동-오오무라 영주의 신앙과 배교 역사 이야기) 오오무라 호코바루 처형장 (AM11:30-PM12:15)오오무라 코오리 박해 이야기구비기리(목 베기) 체험고백: 당신은 주님을 위해 죽을 수 있습니까찬양: 하늘가는 밝은 길이(10분 버스이동-오오무라 순교자의 이야기)오오무라 구비츠카 머리무덤 (PM12:25-12:50)몸체와 머리무덤 이야기 (10분 버스이동-부페식당 이용안내)오오무라 스타미나 타로 부페식당 (PM1:00-2:00)(고속도로 1시간30분 버스이동-휴식) 운젠 헤이세이신잔 화산 탐방 (PM3:30-4:10)(20분 버스이동)운젠지옥 순교지 (PM4:30-5:30)운젠지옥의 고문 이야기지옥온천 체험 (PM5:30-6:30) (고속도로2시간 버스이동-휴식)나가사키 짬뽕 저녁식사 (PM8:30-9:3
두 번째가 평신도 사역이다. 초대 가정교회는 목회자가 단독으로 이끄는 교회가 아니었다. 오히려 초대 가정교회는 평신도가 사역하는 교회, 평신도가 살아있는 교회, 평신도가 움직이는 교회였다. 즉 초대 가정교회는 사람을 세우고 위임하는데 앞장섰다. 목회자 중심으로는 무척 힘든 일이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어떻게 초대 가정교회를 평신도가 사역하는 교회로 만들 수 있었을까? 바울의 1차 전도 대상자는 고넬료(행10:2)나 디도 유스도(행18:7)와 같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무할례자로 높은 사회 계층에 속해 있는 자들로 회당을 경제적으로 돕고 있는 자들이었다. 하지만 아직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은 자들이었다. 또한 바울의 1차 대상자들은 사업가나, 관료인이나, 재력가나, 귀부인들도 있었는데 루디아, 아굴라와 브리스가, 그리스도, 스데바나, 가이오, 뵈뵈, 빌레몬, 눔바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당시 높은 신분에 있던 자들로 어떻게 개종하였을까?제자를 만들어 사람을 세우기 위해서는 두 가지 원칙이 있어야 한다. 즉 ‘전수’의 원칙 두 가지를 살펴보면 첫 번째가 앞선 자의 ‘삶’(life)이다. 앞서 있는 리더의 삶을 보고 따르는
(일본 최초의 개신교 교회)C. M. 윌리엄즈 선교사는 1859년 6월 미국 개신교 감독교회로부터 파견되어 그 해 10월 말경 히가시야마테의 오란다자카 언덕에 선교사관을 건립하고 거주했다. 그는 1862년 10월 히가시야마테 11번지에 일본 최초의 개신교 교회를 설립했다. (일본최초의 개신교교회 터)윌리엄즈 선교사가 나가사키를 떠난 뒤 이 교회는 영국선교회(영국 성공회)가 이어받아 영국교회라고 불리게 됐다. (나가사키 오란다자카에 세워진 개신교 학교들)1881년 10월 23일 미국 테네시주 아센스로부터 일본에 온 카롤 롱 박사에 의해 오란다자카에 진제이 학원의 전신인 미션 스쿨 “카부리 영화학교”로 창립됐다. “카부리”라는 교명은 이 학교의 설립을 위해 최초로 2달러의 후원금을 기부한 미국의 콜베이 부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 학교는 종전 후 이사하야시로 이전하여 나가사키 웨슬레안 대학 및 진제이고등학교가 됐다.(캇수이 학원)캇수이 학원은 1879년 미국에서 파송된 엘리자베스 러셀 선교사에 의해 나가사키의 히가시야마테 16번지에 설립해 일본의 여학교의 효시가 됐다. “캇수이(활수)”의 명칭은 요한복음 4장 10절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이와같이 나가사
초대 가정교회는 왜 경쟁력이 있을까? 당시 수많은 박해와 핍박 가운데서도 넘어지지 않고 오뚝이처럼 우뚝 서게 된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가정교회가 무엇을 했기에 초대교인들이 그토록 열광했는지 궁금하다. 그 첫 번째가 예배이다. 이들의 예배는 나눔이 있고, 사랑이 넘치며, 섬김이 있고, 만나고 싶고, 차별이 없는 예배를 제공했다. 다시 말해 초대 교인들은 예배가 기다려지고 성도들을 하루 빨리 만나고 싶은 사랑이 듬뿍 담긴 예배가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매료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한국교회에 절실히 필요한 예배이다. 초대 가정교회 예배는 과거 회당과는 달랐다. 회당은 가정교회(오이코스)보다는 깊은 역사를 지니며 원래 토라를 연구하는 곳이었다. 이곳에서는 유대인만이 예배를 드리고 남성만이 참석할 수 있었다. 당시 이미 다문화사회였던 헬라 문화권에서 유대들만의 예배는 주변 사람들에게 별 파괴력이 없었다. 하지만 가정교회는 아니었다. 사도행전 2장 42절의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에 힘쓰니라”고 했듯이 초대 가정교회의 예배는 말씀(“가르침을 받아”)과 주의 만찬(“떡을 떼며”)으로 이뤄졌다. 문헌에 따르면 2세기경
(나가사키 니시자카 순교지)나가사키시 니시자카 순교지는 세계적으로 알려진 순교지이다. 금교령 하에서 정확한 장소는 확실치 않으나 여러 사료를 통해 이전부터 바테렌 부정지(선교사 처형지)로 알려져 온 현재의 니시자카 언덕으로 추정되고 있다. 26인의 순교자가 처형된 것은 1597년 2월 5일로, 1962년 기념비와 기념관이 건립되어 니시자카 공원으로 조성됐다.토쿠카와의 에도 막부는 종문개역을 효과적으로 적용하기 위해 구체적인 몇 가지의 제도를 실시했는데 현상소인제도와 오인조연좌제 그리고 에부미와 사청제도 및 종문인별개제도였다. 현상소인제도는 키리스탄을 고발하는 사람에게 상금을 수여하는 제도였다. (키리스탄 적발 포고문[인본 26순교자기념관])에도 막부와 각 번은 크리스천의 적발을 위한 목적으로 정보제공자에게 상금을 주는 제도를 시행하여, 1618년 나가사키에서는 은봉30개를 상금으로 준다는 포고문도 걸렸다. “선교사, 수도사, 그리고 신도를 신고하는 자에게는 즉시 은을 수여한다”는 포고문이었다. 5인조연좌제는 연대책임을 지우는 제도였다. 원래는 다섯 가구씩을 한 조로 편성하여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하는 제도였으나 크리스천 적발을 위해 이용된 감시제도였다. 같은
(이키츠키 박물관)이키츠키 섬의 역사와 생활을 소개하는 박물관으로, 히라토 섬에서 이키츠키 섬으로 건너가는 이키츠키 대교의 건너편 교각 부근에 위치해 있다.이층의 전시실에서는 자비에르 선교사 이후 현재까지 이키츠키 섬에서 비밀스럽게 신앙을 지켜온 카쿠레(위장) 크리스천의 역사를 살펴볼 수가 있다.산 주안 순교지는 카밀로 콘스탄치오 선교사를 도왔던 이키츠키의 무사 산 주안 사카모토자에몬을 포함하여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순교한 곳이다. 이 섬은 후에 산 주안이라 불리며 이키츠키의 크리스천 성지가 됐는데 섬의 갈라진 바위 틈새로 솟아 나오는 물은 세례에 사용되었다고 전한다. (산주안 순교지)토마스 니시의 부친인 가스파루 니시는 1609년에 처형되어 이키츠키 최초의 순교자가 됐다. 그는 당시 십자가가 세워진 묘지에서 처형되기를 소망했다고 하는데, 그곳은 후에 ‘쿠로세노츠지’라고 불리게 됐다. 자비에르 일행이 떠난 뒤 히라토는 이키츠키, 타쿠시마, 네시코 등의 영주인 코테타가 키리스탄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됐다. 1566년에 크리스천이었던 오로쿠닌사마가 불교도인 영주의 명령에 반항하다가 네시코 해변의 바위에서 처형됐다. (네시코 해변의 승천석)코테타가의 자손들은 159
일례로 2년 이상의 장기간에 걸친 시리아 내전으로 인해 시리아 무슬림들이 요르단, 터키, 레바논 등 주변국가로 대거 유입이 됐는데, 이들 난민들에게 구호사역과 함께 직접적인 복음전도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시리아 난민 무슬림들에게 물질적인 도움과 함께 복음을 전하고 아랍어 성경, 전도 책자 등을 나눠 주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이전에 없던 전대미문의 일로써, 길을 여시고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이자 무슬림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절호의 기회로 생각되는 것이다. 또한 선교에 미치는 부정적인 측면으로는 민주화 과정에서 치안의 부재와 체제 불안으로 선교사들의 안전이 위협되어 사역이 위축될 수 있다. 선교사들이 피랍되거나 순교의 상황으로 치달을 수 있고, 애써 일구어 놓은 사역지에서 철수해야 하는 상황이 전개될 수 있다.또 혁명의 공과를 둘러싼 권력 암투가 진행되고, 선거 과정에서 선명성을 내세운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이 일시적으로 득세할 수 있다. 한편 구호 사역이나 지역개발 사역의 현장에서 이를 통해 민심을 얻으려는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과 복음을 전파하려는 기독교 선교사들이 직접 부딪히게 될 가능성들이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히라토 항)히라도 항은 전국시대 이전부터 대륙과 교역을 해왔으며, 마츠우라 당이라고 불리는 왜구의 근거지였다.16세기 초 동남아 해역에서 활동하던 중국(명) 해상 왕 오봉왕직은 1540년 일본의 고토에서 교역을 시작했다. 그는 히라토의 영주 마츠우라 타카노부의 초청을 받아 히라토에 상관을 개설했다. 1550년 6월 오봉왕직의 권유로 최초의 포르투갈 선이 히라토 항에 입항하게 됐다. 이후 히라토는 오봉왕직의 항로 안내를 통해 포르투갈과 중국과의 교역의 중심지로 번영했다.(언덕위의 히라토)미나모토 요리미츠의 부장인 와타나베의 손자가 큐슈의 마츠우라에 진입하여 마츠우라씨를 자칭하며 마츠우라 48당이라고 불리는 왜구를 주력으로 하는 호족이 됐다. 이곳에 처음으로 성을 쌓은 것은 마츠우라가 조선 침략 전쟁으로부터 귀국한 1599년이며, 그 후 한 때 파괴됐다가 1707년에 다시 축성됐다. 이 성은 카메오카 산이라고 하는 바다에 돌출한 둥근 산을 이용해 쌓았는데, 제일 높은 곳에 중심건물을 두고, 그 남쪽으로 성의 외곽, 그 서쪽으로 산노마루를 두었다. 천수각은 지어지지 않았지만 삼면이 바다에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로서, 산상의 건물은 1875년에 해체되어 황폐했으나,
3. 중동 이슬람권 선교의 발자취우리 침례교단이 중동 이슬람권 선교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불과 수년 내의 일이다. 이는 침례교단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의 관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이유는 중동이 지리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한국과 멀고, 이 지역에서 선교적인 열매를 거둔다는 것이 요원했기 때문에, 복음의 추수가 왕성하게 일어나고 있는 지역에 우선적으로 선교역량을 더 집중했던데 원인이 있다고 하겠다. 2013년 3월 현재 침례교 중동지부에 소속되어 활동하고 있는 선교사는 6개국(요르단, 이스라엘, 오만, 이집트, 아랍에미리트, 레바논)에서 10Unit이 사역하고 있다. 사역 내용을 살펴보면,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교회를 개척, 운영하며 제자훈련과 이슬람권 사역의 발판을 마련하고 있는 두 가정(요르단, 이스라엘)이 있고, 한인교회 사역을 감당하면서 구제 및 복음전도, 교회개척 사역을 하는 가정(오만)이 있다. 또한 팔레스타인 난민들을 대상으로 지역개발과 복음 전도를 감당하는 가정(요르단)이 있고, 이라크난민과 시리아난민을 대상으로 구호 및 복음전도, 교회개척 사역을 하는 가정(요르단)이 있다. NGO와 연계된 유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