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버린 골짜기[코스테타니]에 세워진 기념비) 사가 번의 부동산의 크리스천에 대한 대대적인 토벌이 있던 당시, 험악한 무사들에게 쫓겨 오오부네 부락으로부터 산을 향해 급히 도망하던 크리스천 신도들이, 점차 사태가 급박해지자 팔과 다리에 들러붙는 어린 자식들을, 이 골짜기 아래쪽으로 던져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 자식 버린 골짜기(코스테타니)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자식 버린 골짜기(코스테타니)에서 700여 미터 올라간 야마모토카와의 산기슭에 엿보는 곳(노조에)이라는 곳이 있는데, 자식을 버리고 산으로 피신한 신도들이, 버리고 온 자식들이 걱정되어 산에서 내려와 그곳에서 엿봤다고 하여 노조쿠(엿보다)가 변하여 노조에라고 불리게 됐다고 전한다. (엿보는 곳[노조에]에 세워진 기념비)무사들의 토벌을 피해 급히 피신하던 크리스천 신도들이 당황하여 코스테타니에 자녀들을 버렸으나, 도망 중에 버리고 온 자녀들이 걱정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부모의 마음. “버린 자식들은 어찌되었을꼬”하며 도망하던 길에서 돌아와 이곳에서 엿봤다고 한다. 이후에 노조쿠(엿보다)라는 지명이 변하여 노조에라고 불리게 됐다고 전한다. 당시 혹독한 박해의 시대에 크리스천의 잔혹한 역사로부
(카와타나 크리스천 묘비)카와타나 크리스천 묘비는 오오무라의 코오리 쿠즈레 이후 오오무라영에서 기적적으로 파괴를 면하고 남아 있는 크리스천 묘비의 하나이다. 묘비 상부의 둥근 원 안에 CRVS(크루스, 십자가)와 그 아래에 MACi(만시아, 세례명)를 나타내는 글자를 교묘하게 중복하여 새겨 넣어 크리스천 검색을 피하고자 한 흔적이 엿보인다. 또한 토미나가의 처, 겐나 8년이라는 한자도 새겨져 있어서 카와타나 지역의 크리스천 사무라이 가족의 묘비로 추정된다. 이 같은 화양절충양식의 크리스천 묘비는 전국에서도 진귀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시미 크리스천 묘비)하사미 크리스천 묘석은 크리스천의 신분을 감추기 위해 석공의 손을 빌지 않고 조잡한 솜씨로 가족이 직접 비밀스럽게 십자가 문양만을 음각한 것으로 자연석을 이용하여 토대도 없이 서쪽을 향해 세워져 있다. 이 당시의 엄중한 검색 중에도 남아 있게 된 것은 기존의 다른 묘비들과는 달리 자연석으로 세운 묘비이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이 지역의 크리스천 분포의 실증자료로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에부미[성화 밟기])에부미(성화 밟기)는 나가사키에서 시작되어 큐슈 내에서 크리스천 적발을 위해 시행된 정신적 고
누가 인도했나?원형교회의 부흥은 곧 바로 다른 교회를 분가시키는 힘이 된다. 원형교회가 잘 되면 다음 교회 분가도 잘 된다는 뜻이다. 그 예를 안디옥교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루살렘교회는 정치적 핍박을 받아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는데 일부가 안디옥까지 흩어져 안디옥교회를 세웠다(행 8:1; 11:19). 놀라운 것은 신생 안디옥교회가 교회를 개척하자마자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이다(행 11:21). 왜 그럴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안디옥교회의 창립 멤버가 예루살렘교회 출신들이란 사실이다. 이들 핵심은 마리아와 바나바로 예루살렘에서 이미 가정교회로 성공의 맛을 본 자들로 안디옥교회를 세우는데 그리 힘들지 않았다. 과거에 예루살렘교회에서 성공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수’의 힘이다. 즉 예루살렘교회에서의 사랑과 섬김의 힘은 안디옥교회에 그대로 전수되어 교회 일꾼들을 세우고 복음을 확장시키는데 큰 역할을 감당했다. 안디옥교회에서 바나바와 마리아의 신앙을 전수 받은 자들이 바로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과 구레네 사람 루기오와 분봉 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행 13:1) 이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신분이 높고 사회적 영향력이 있는 자들이
1. 들어가는 말중동은 기독교 복음이 시작된 발원지이면서도, 세계 복음화 완성의 여정에서 볼 때 사탄의 가장 완강한 보루라고 할 수 있다. 주후 6세기까지만 해도 이 지역은 초대 교회 성도들의 피땀 흘린 노력으로 기독교가 왕성하게 꽃피웠다. 그러나 A.D. 610년경 무함마드로부터 이슬람 공동체가 시작된 이후, 불과 한 세기가 지나기 전에 이 지역은 이슬람교에 의해 초토화됐고, 사탄은 일천년 이상동안 이 지역을 장악하며 이 곳 사람들의 영적인 눈을 가리고 지옥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그동안 이 지역 영혼들을 구원하고 하나님 나라를 회복하기 위한 시도가 계속 있어 왔다. 특히 19세기 후반 영·미를 중심으로 해외 선교운동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던 시기에, 이 지역은 기독교 성지로서 특별한 관심을 받고 많은 서양 선교사들이 내왕했고 사역이 시작됐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특성과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심리적인 저항에 직면하여 선교 사역의 열매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제는 중동 이슬람권 선교의 열쇠가 지난 세기 부흥의 주역이었던 한국 교회와 한국 선교사들의 몫으로 남겨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서구 제국주의 열강의 침탈과 수 차례에 걸친
(시마바라 성)1616년 시마바라에 영주로 임명 받아 오게 된 마츠쿠라 시게마사는 7년간의 혹독한 공사를 벌여 1624년 시마바라 성을 축성했다. 마츠쿠라 시게마사의 아들인 마츠쿠라 카츠이에는 시마바라성 건설을 위한 과중한 부담으로 영민을 괴롭게 한 아버지 시게마사 이상으로 중세를 부과하고 금교의 이름으로 크리스천 영민들을 위협했다. 당시 이상기후로 인해 해마다 흉작이 계속됐음에도 불구하고 카츠이에는 혹독하게 세금과 부역을 부과했고 납부하지 못한 영민들의 등에 짚을 지게 하고 거기에 불을 지르는 등 잔혹한 형벌을 시행했다. 1637년 8월경 기아와 흉작 그리고 과중한 세금으로 고통 받는 시마바라와 아마쿠사에 불온한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12월경 세금을 기한 내에 납부하지 못한 쿠치노츠의 임신부를 물고문하여 임신부와 태내 아이까지 살해한 것에 영민들의 분노가 폭발해 시마바라 반도 남부 지역의 대관들을 습격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고 한다.(하라성 혼마루에 세워진 소년장수 야마쿠사 시로 동상)1637년 12월 12일 소년 장수 아마쿠사 시로를 총대장으로 하여 크리스천 신자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시마바라와 아마쿠사의 농민군 약 3만7천여 명이 시마바라성으로
초대교회가 잘 된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 때문이다. 초대교회가 말할 수 없는 고난을 극복하고 헬라권 전 지역에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평신도들의 희생과 섬김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신변의 위협을 무릅쓰고 과감히 자기 집(오이코스)을 오픈해 예배를 드렸다. 가정교회가 시작된 것이다. 그 시발점이 예루살렘교회이다. 재미있는 것은 예루살렘교회는 처음부터 다양한 언어를 사용한 예배 모임이 있었다. 마치 미주 한인교회에서 한어부 예배(KM)와 영어부 예배(EM)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신학자들에 따르면 예루살렘교회는 헬라파 중심의 ‘헬라어 사용자들의 모임’과 히브리파 중심의 ‘아람어 사용자들의 모임’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사도행전 6장 1절을 보면 예루살렘교회가 구제 사업으로 히브리파 유대인과 헬라파 유대인들이 서로 다툰 것을 보아 알 수 있다. 초대교회 당시 예루살렘교회는 이미 다문화 예배가 진행됐는데 헬라어로, 아람어로, 때로는 함께 예배드린 것이다.그렇다면 예루살렘교회에서 누가 헬라어 사용자들의 모임을 인도했을까?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이다. 마리아 앞에 마가 요한이란 수식어가 있는데 마가는 로마식, 요한은
(미미사이 정류소)나가사키로부터 운젠지옥으로 보내지는 것을 ‘야마이리(입산)’라고 불렀는데 나가사키로부터 모기로 나와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오바마에 상륙하여 운젠에 올라갔다고 전해진다. 야마이리의 신자들은 한쪽 귀를 잘린 채 끌려갔는데 이는 탈주하더라도 곧바로 크리스천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기 위함이었다. 오바마로부터 운젠을 향해 지그재그로 올라가는 도중에 크리스천의 귀를 잘랐던 옛 관청 건물이 있었다고 하는데, 현재는 미미사이(귀 자르기)정류소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순교자의 오솔길)오바마와 구치노츠 그리고 아리에로부터 운젠으로 올라오는 길들이 합쳐지는 지점에 “여기부터 운젠”이라고 하는 석주가 있고, 그 옆에 “이 길을 따라 운젠지옥으로 끌려가는 크리스천들이 걸었다”고 하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1616년 시마바라에 영주로 임명 받아 오게 된 마츠쿠라 시게마사는 처음엔 기독교의 선교를 묵인하였다. 시마바라성의 건설을 위해서는 영민들의 협력도 필요한데다 크리스천이 많은 시마바라를 다스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에도에의 참부 후에 갑자기 박해를 시작하였다. 토쿠가와 이에미츠로부터 질책을 받은 것이 원인이었다. 토자마(변방지역) 다이묘들을 갈아치우던
(스즈타 감옥터)스즈타 감옥은 오오무라의 남쪽으로 이사하야로 통하는 국도 근처의 작은 언덕 위에 있다. 원래의 오오무라 감옥은 혼코우지 감옥이라고도 불리며 3대 번주인 스미노부의 때인 케이안 원년(1648)에 나가사키 봉행의 요청으로 외국인 죄수들과 특별히 막부의 명령으로 체포한 죄인들을 가두어두기 위해 건립됐다. 오오무라가의 기록에 의하면 ‘기존의 감옥이 타마치에 있어 그것을 부쿠로코지로 이전했다. 겐나 년도(1618)에 나가사키 부교의 명에 의해 스피노라 선교사와 신도들을 부쿠로코지의 감옥에 수감하였다가(1619년 8월 조선인 베드로 아리조의 참외 반입사건으로 인해) 이들을 스즈타 감옥(1619)으로 이감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현재는 그 부근에 1959년에 세워진 높이 6m의 십자가 탑이 세워져 있다. 이 감옥은 1618년 12월 13일에 나가사키에서 체포된 선교사들과 신자들 35명이 1619년 8월 7일부터 1622년 9월 9일까지 수감되었던 장소로 알려지고 있다.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3인이 사망하고 스피노라 선교사 등 24인은 1622년 9월 9일 나가사키로 호송되어 다음날인 10일 나가사키의 니시자카 언덕에서 순교하였고, 프랑코 선교사 등 8명
초대교회가 수많은 핍박과 박해를 이겨내고 헬라 전 지역에 선교를 잘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로마의 3백년간의 평화 시기, 도로 발달, 헬라어 통용, 박해, 순교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가 우세했다. 이러한 일반적 요인이 초대교회를 확장시키는데 일등 공신이라고 주장한 학자로는 허버트 케인(Herbert Kane), 후스토 곤잘레스(Justo L. Gonzales) 등이 있다. 그런데 최근에 새로운 주장이 등장하여 눈길을 끌고 있는데 소위 가정교회 요인이다. 대표 학자로는 로저 게링(Roger W. Gehring), 브래들리 블루(Bradley B. Blue), 빈센트 브라닉(Vincent Branick), 델 버키(Del Birkey)와 같은 인물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종전의 일반적 요인도 초대교회의 선교에 큰 공헌을 하였지만 이와 함께 가정교회가 오히려 더 큰 영향력을 끼쳤다고 주장하고 있다그렇다면 초대교회 당시 가정교회가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어서 그토록 파워가 넘쳤는지 궁금하다. 당시 초기 기독교인들은 주로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예를 들어 마가 요한의 어머니 집(행 12:12), 루디아의 집(행 16:15), 아굴라와
AD 313년 콘스탄틴 황제에 의해 기독교가 공인된 이후, AD 451년 로마 감독이었던 레오 1세는 기독교 공동체 전체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교황권의 강화는 로만 가톨릭에 물질적인 풍요를 가져오게 되어 점차 로만 가톨릭의 세속화를 초래하게 되었고, 정치 면에서 세속 군주와의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됐으며, 성상 숭배의 허용으로 동?서방 교회의 분열을 가져오게 됐다. 교황의 아비뇽 유수로 인해 절대시되던 로만 가톨릭의 권위는 실추됐고, 교황제도의 부패와 면죄부 판매에 따른 로만 가톨릭의 타락상으로 인하여 수도원을 중심으로 종교개혁의 토양이 조성됐다. 또한 존 위클리프를 비롯한 종교개혁의 선구자들을 통해 성경의 권위가 강조되고 교황과 로만 가톨릭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는 종교 개혁운동의 분위기가 확산됐다. 1517년 마틴 루터에 의해 촉발된 종교개혁의 불길은 전 유럽으로 퍼져 나갔고, 이러한 종교개혁운동에 영향을 받아 로만 가톨릭 내부에서도 수도원을 중심으로 개혁의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교회 내부의 개혁운동의 하나로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카회를 비롯한 탁발수도회에 의한 해외선교가 활발하게 추진되었는데, 특히 1534년 이그나
사랑하는 한국의 성도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일본에 복음을 전하려는 뜨거운 마음을 가지고 8년 전에 나가사키에 오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이 460여 년 전부터 기독교 신앙의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습니다. 이미 16세기 중반에 많은 선교사들이 이곳에 와서 생명을 바쳐 헌신하였고 수많은 교회가 세워졌으며 주민 대부분이 크리스천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또한 400년 전에 시작된 박해의 시기에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신앙을 지키기 위해 순교한 역사가 저에게 깊은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복음을 전하려는 가슴 벅찬 사명감으로 일본에 왔는데 오히려 이곳에서 순교의 신앙을 배우게 된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지금도 생생히 전해지고 있는 선교의 역사와 순교의 증언을 한국의 크리스천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끼게 됐습니다. 이 책을 통해 그렇듯 훌륭한 나가사키의 순교의 신앙을 함께 배우게 되기를 바랍니다.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알의 롯 동굴과 롯 기념교회롯 동굴과 롯 기념교회가 위치한 곳은 소알(Zoar)지역이다. 현지 지명으론 사피(Safi)이지만 소알의 이름도 함께 알려져 있다. 창세기 14장은 소알을 포함한 사해 주변에 5개의 왕국이 있었다고 언급한다. 비록 왕국이라고 언급 되지만 당시 왕국의 개념은 작은 지역으로 인구 약 1천여 명의 작은 소왕국 개념이다. 현재의 한국 면 단위 보다도 작은 규모이다. 그렇기에 소돔이 멸망할 때 롯은 가까운 성읍 소알로 피하기를 간청했다. 소알을 심판하지 않겠다는 천사의 도움을 받은 롯 가족은 유황불이 쏟아지는 소돔을 뒤로하고 소알을 향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소돔에 미련이 남은 롯의 처는 연기 나는 소돔을 돌아보다 천사의 경고처럼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다. 결국 롯의 처는 심판은 피했지만 과거에 대한 미련으로 인해 소금 기둥이 되고 만 것이다. 피난 속에 아내를 잃은 슬픔이 있었지만 소돔을 떠난 롯 일행은 해가 뜰 무렵 소알에 도착하였다. 아브라함을 떠나며 많은 양떼를 몰고 들어갔던 소돔이었지만 모든 재산을 유황불에 멸망하는 소돔에 놓고 나온 것이다.롯과 두 딸이 소돔을 떠나 소알 성읍으로 피난을 왔지만 롯이 소알 거주민들과 함께 거하기를
소돔과 고모라(심판과 형벌의 땅‘밥 에드라’와 ‘누메이라)타락과 죄악의 상징인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그 위에 유황과 불 내려진 심판으로 소돔과 고모라가 사라졌다. 이 사라진 소돔과 고모라를 찾기 위한 노력이 19세기에 많이 이루어 졌다. 사해 근처에 있는 여러 텔들이 소돔과 고모라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연구되는가 하면 소돔과 고모라의 위치를 놓고 사해의 북부냐 남부냐 하는 논쟁들이 있어졌다. 많은 주장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해 인근에서 조사되어진 여러 텔들에서는 가장 중요한 소돔과 고모라와의 동시대인 (B.C. 3150~2070년)이 유적층을 증거해 주지 못했다. 그러던 중 1896년 요르단의 마다바에서(성 조지 교회) 6~7세기 비잔틴 모자이크가 서방세계에 알려졌고, 이 지도에 표시된 소알의 위치가 사해의 남동쪽 끝에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오랜 기다림 끝에 소돔과 고모라의 지리적 위치가 소알을 통해 들어난 것이었다. 고대 역사가였던 디오도로스, 스트라보, 요세프스, 타키투스, 중세의 아랍지리학자인 야쿠트, 마순디, 무카다시, 이븐 아바스 등이 소돔과 고모라 그리고 소알에 대한 기록을 남겼었다. 1924년에 윌리엄F. 올브라이트, 멜빈G. 카일 목사
엘리야 언덕을 보는 법엘리야 언덕을 방문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침례터를 안내하는 현장 가이드에게 미리 이야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침례터 위주로 안내가 진행되기 때문이다. 특별히 단체로 입장하면 타고 온 관광버스를 이용해 들어가기 때문에 단독 그룹으로 엘리야 언덕을 가면 된다. 그렇지 않고 개별적으로 방문을 했다면 침례터를 순환하는 셔틀 버스를 이용하게 되는데 이때도 안내하는 현장 가이드에게 미리 엘리야 언덕을 가고 싶다고 말을 하고 안내를 부탁해야 한다. 약간의 팁을 미리 주는 것이 개인적으로 갔을 때 엘리야 언덕을 가는 지혜로운 방법이다. 단 남들이 보지 않게 주라.(단독 개인 가이드도 가능하다.)엘리야의 언덕을 방문하면 무너진 터들을 다시금 복구해놓았다. 이용하기에 편리해 진 것은 사실이지만 복구와 개발의 과정에서 엘리야 언덕 밑쪽으로 흐르던 물길이 바뀌어 버린 것이다. 엘리야 언덕이 발굴될 시점인 2001년에 관관청과 군부대의 방문 허락을 받아 그 곳을 방문 했을 때에는 건기인 한 여름에도 우물에(안내서 6번) 물이 있어 두레박을 이용 시원한 물로 손을 씻을 수 있었고 엘리야 언덕에서 가까운 침례 요한의 우물에도 샘물이 솟아올랐기에 그 물로 땀을 씻을 수
7. 엘리야의 언덕(Elijah’s Hill)엘리야의 승천과 예수님의 침례와 침례자 요한의 활동지 등은 3Km 반경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그러므로 침례터를 방문하면 3곳 모두를 볼 수 있다. 대신 3곳 모두를 보려면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방문해야 하고 현장을 안내하는 현지 가이드에게 엘리야 언덕을 방문하겠다고 미리 이야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침례터를 찾는 순례자가 많기에 안내가 주로 예수님의 침례기념교회(침례자 요한교회)와 요단강을 보는 것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미리 이야기를 하지 않는 경우 엘리야 승천 언덕은 손가락 안내로 지나쳐 간다.선지자 엘리야 요단강 동편 디셉 사람인 선지자 엘리야는 두 가지의 특징을 갖는다. 첫째는 선지자 에녹과 같이 살아서 하늘로 승천한 선지자라는 것이고, 둘째는 모세와 견줄 정도로 많은 기적을 행하였던 선지자이다. 이 두 가지 특징 때문에 구약의 많은 선지자들 중 모세와 더불어 구약을 대표하는 선지자로 알려졌다. 특히나 예수님이 세 명의 제자들과 기도하러 산에(변화산 사건) 올랐을 때 모세와 더불어 예수님과 제자들 앞에 나타났기에 엘리야의 위치가 어느 정도 이었는지를 추측하여 볼 수 있다. 특히나 이세벨이 ‘바알과